13. 1분 1초도 늦지 않았다. 정확히 기계의 숫자가 18을 만드는 순간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찍 들어간다는 누군가의 부러움 섞인 핀잔에도 변명으로 머뭇거릴 순간이 없었다. 나는 그저 미소로 대꾸하고, 인사로 대답하며 그대로 터벅터벅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퇴근하고 주차장에서 봐요. 회의를 들어가기 일보 직전, 내 말에 곽아론은 그저...
12. 누군가를 기억할 때 결국 남는 것은 가장 마지막 감정이라고들 한다. 내 지난 연애들의 마지막이 내 스스로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그것이 실패로 남은 것처럼, 결국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점철되었다. 좋았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실패했다고 믿었던 그 지난 사랑들에게도 분명히 좋았고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있었다. ...
11.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선 많은 이유가 필요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지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 이유 몇 개가 손에 꼽히고 나면 그것은 곧 그럴듯한 명분이 된다. 간사하고 하찮은 것이 인간이라 그 명분이 결국 뜻밖의 용기를 만든다.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하게 만들고,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일에 뛰어 들게 하...
여름의 끝 푹푹 찌는 날씨를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사방으로 뻥뻥 열어 놓은 문을 비웃기라도 하듯 쏟아지는 섬의 햇살은 신의 선물이라기보다 신이 주는 장난에 가까웠다. 반짝거리는 물빛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풍경을 미간을 있는 대로 구긴 채 바라보던 나는 곧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마루와 방의 경계 어디 즈음에 몸을 절반씩 나눠 걸치고 누워버...
10. 내가 푹 자길 바란 곽아론의 생각은 빗나갔다. 나는 꽤 오래 잠에 들지 못했고, 몇 번 뒤척였다. 생각할 것이 많았다기보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맞았다. 한참이나 나를 안고 토닥거리던 곽아론은, 내가 잠이 들었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자지 않으면 먼저 잠들지 않을 것 같아 부러 자는 척을 하고...
오늘의 메뉴 따지고 들자면 친구라는 결론 자체가 무리 있는 것이긴 했다. 강동호와 나는 얼핏 그냥 보이는 것으로도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부류의 인간들이었다. 운동하게 생겼는데. 처음 내가 강동호를 마주 했을 때 했던 생각이었다. 어? 어떻게 알았냐. 나 검도만 7년 했는데. 그 생각은 어느 순간 궁금증으로 바뀌어 입 밖으로 튀어났다. 너 운동했어? 완전히 ...
9. 대단한 걸 하고 싶은 사람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곽아론의 목적지는 서울 시내의 한 호텔이었다. 어떻게든 8시까지 일을 끝내고 곽아론의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려던 나는, 언제나 늘 그렇듯 퇴근을 하기로 마음먹은 시간에서 정확히 한 시간이 모자랄 때 터진 일을 수습하느라 30분을 더 써버렸다. 협력사에서 일이 터졌다고, 조금 늦어질 ...
8. 비슷한 시간, 같은 버스를 타고 아마 일주일 전에 입었을 지도 모르는 셔츠를 끼워 입고 나서는 길은 똑같은 모양 그대로였다. 어제도 그랬고, 어제의 어제도 그랬을 날. 달라진 것은 날씨 정도가 전부였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건 그 사랑이 ...
7. 마음에는 죄가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 자체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다. 그 마음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는 것, 마음이 실체가 되었을 때야 그것은 옳고 그름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왜 하필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까는 무의미한 가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아니라 조금 더 좋은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이 아닌 그 옆의 다른 누...
6. 악역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는 숱한 사람들 중 첫눈에 저 사람은 내 인생의 악한 부분을 담당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어제까지는 괜찮은 것 같았던 사람이 오늘의 내게 비수를 꽂을 수도 있고, 내 등 뒤에서 나를 겨냥하고 있던 것이 사실은 총이 아니라 붉은 장미 꽃다발일 수도 있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
5. 우리는 종종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일을 저지를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는 표현보다 확실히 저질러졌다는 말이 어울렸다. 그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뻔히 보이는 결론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간의 감정이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런 일을 벌인다. 후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
2/2 내 기억 속의 강동호는 아주 작은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져 조각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라며, 잘 지내라는 박새희의 말에 마주 했을 때, 나는 그 조각들을 조금 이어 붙이는 정도였다. 비슷한 사내놈들이 수십은 더 가득한 공간에서 굳이 강동호에게만 인상적인 부분을 찾을 이유도 없었기에 그저 같은 과 녀석이라고 인식하고 말았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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