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황민현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따라온 떨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하게 짚을 수는 없지만, 마음을 인정한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했던 움직임이었기에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얻게 되는 달란트라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의 구체적 형상화였고, 그것을 사람들은 대게 설렘이라 불렀다. 떨림을 인지한 순간이 그 순간이었던 게 문제라면 문제였...
6. 작가님, 괜찮아요? 첫 말은 그렇게 돌아왔다. 마감을 아직 온전히 하루 넘게 남기고 있는 날 도착한 원고에 고맙다는 답 대신 헐레벌떡 걸려온 전화를 동호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태연하게 받았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여보세요? 한 마디에 정신없이 쏟아지는 목소리를 그저 덤덤하게 듣고 있던 동호는 곧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이면 전화기에 대고 기침 한 번...
5. 평범하고 보통의 남자애였다. 아직 완전히 고치지 못한 사투리가 멀끔한 외모와 묘하게 역설적으로 어울렸다. 공부만 하는 범생이 중에 범생이라고, 그래서 부산에서 난다긴다하는 놈들 다 물리치고 서울에 있는 그것도 명문대에 당당히 입학 했다고, 꼭 제 자식인 것 마냥 자랑을 늘어놓던 여인의 말이 황민현을 대변하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쁜 짓이라곤...
4. 황민현이 이혼을 했다. 이 명제는 몇 번을 자고 일어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가정이 아닌 참이 된 이 진실은 법이라는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보장 받는 것이었다. 절대 누설하면 안 될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당사자가 먼저 말을 하기 전에 떠벌리고 다닐 수도 없었던 그 이야기가 이제는 모두들 당연히 알아야 할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넌 ...
이별의 개연성 버스 시간표만큼 자주 있는 제주행 비행기는 비슷한 시간에 모두 태우고 있던 사람들을 뱉어냈다. 덕분에 북적거리는 공항에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내린 나를 마중 나온 건 때늦은 장마였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반사적으로 멈춰 선 나는 이내 느리게 하늘로 고개를 꺾었다. 하늘은 완전한 회색빛이었다. 잠깐 오는 소나기가 아님을 직감하자마자 쏟아지는 한숨...
3.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얻어지길 기대하는 것이 있다. 부와 명예 같은 아주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고, 불어 닥치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마음 같은 추상적인 종류의 것이기도 했다. 열두 살에 볼 수 있던 세상은 고작해야 집 앞의 골목과, 매일 같이 다니는 학교의 운동장이 전부였다. 겨우 그것을 보고도 걸어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느꼈던 순간이 있...
2.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옥탑의 가을은 조금 더 길게 해가 머물렀다. 그 아래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 동호가 곧 바로 보이는 장독대를 정면에 둔 채, 평상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제 막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려는 하늘에 누군가 잃어버리고 간 보라색 물감이 여기저기 정신없이 뿌려져 있었다. 이름 있던, 그러나 정확히 이름은 모르는 화가가 ...
이번 연애의 결말 : 마침표 계절이 차근차근 바뀌었다. 거리의 나무의 옷이 분홍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완전히 붉어졌다 모든 것을 다 떨구어 버리는 것으로 시간은 제 소임을 다했다. 무엇이라 하더라도 제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듯 최선을 다해 흘러가는 것 속에서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언제가 부터 나이를 헤아리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15. 마지막 퇴근길은 간단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달리 깊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없었던 곽아론에게 마지막은 그저 가볍게 서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쨌든 한 종류의 이별이었음에도 사람들의 얼굴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었다. 평범하고 여상한 얼굴 속에 그 누구도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쌓아온 서사가 없기에 이별의 순간도 얕을 수밖에 없다는...
14. 함께 한다는 것의 정의는 가지각색이다. 함께라는 범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마주보고 함께 있어야 함께 일 수도 있고, 같이 있으면서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함께 일수도 있었다. 꼭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이 닿아 있으면 그것도 함께라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모든 ...
반칙의 마지노선 1. 가을 햇볕이 길게 늘어졌다.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처럼 단단하게 바닥으로 꽂히는 것은 여름처럼 따갑거나 뜨겁지는 않았다. 적당하게 선선한 바람도 분다. 걷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 정도 날씨라면 걸어주는 것이 또 사람 된 도리라는 생각에 타박타박 걸음을 옮기던 동호는 저만치 앞에서 반짝반짝 거리는 것을 향해 조금 큰 보폭으로 성큼성...
영준이 친구 영준이 좋아해? 책상에 놓인 것을 후다닥 뒤로 감췄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아, 미안.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 점심을 먹고 마신 포카리스웨트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수업이 끝나기 5분 전부터 갑자기 밀려드는 이뇨감을 나는 어쩌지 못하고 종이 치기가 무섭게 그대로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화장실은 왜 가고 싶냐, 귀찮게. 시덥잖은 생각...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