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편적 후일담 1/2 절대 만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세상 땅 덩이가 아무리 넓어도 그 대부분이 바다고, 물이고, 얼음이었다. 발을 디디고 설 수 있는 얼마는 전부 모래더미들이었고, 또 얼마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꽁꽁 문을 막아 놓은 곳들이었다. 그 안에서 익숙함을 버리고, 인연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단 하나 나를 만나지...
아직은 햇볕이 쨍쨍 장마가 시작된다던 기상예보는 역시나 구라였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머리만 겨우 감고 나와서 억지로 국에 만 밥을 한 숟가락 먹으며 들려왔던 뉴스에 테라스로 나가 하늘을 살피던 엄마의 성화에 챙겨 나온 우산이 든 가방을 저만치 발로 차서 저만치 밀어 버린 나는 이내 들고 있던 제도 샤프를 내려놓고 오른손 손목을 부여잡았다. “야 몇 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연애사 스물 한 살에 세 달 만난 사람에게 나는 연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보다 조금 더 직설적인 애인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나이대의 우리가 흔히 성별과 친구라는 말의 합성어를 사용했던 것과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야 나의 연인이, 나의 애인이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지는 않아...
5. 어차피 일 년이었다. 길어 보이지만 결코 길지 않은 시간임은 그 속에 있어 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영화 한 편, 더 좋으면 광고도 몇 개 찍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건 아주 운이 좋았을 경우의 이야기다. 아주 깨끗한 셔츠에 무늬를 넣는 것에도 반드시 시간은 걸린다. 어떤 구도로 넣으면 좋을지, 어떤 무늬를 넣어야 할지 온갖 ...
호구의 사랑 아니, 뭐 내가 돌려 말하는 것도 웃기고, 뭐 너도 아주 몰랐던 건 아닐 거고. 여름밤의 노상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주 한여름은 아니라 그런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도 있었다. 편의점의 파란 테이블을 이미 차지하고 있던 몇몇 젊은 대학생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그럭저럭 운치 있게 습기를 머금어 묵직한 공기에 스며들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봤...
4. 대가 없는 다정은 없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겪은 수많은 것들 중 유일하게 쓸모 있는 교훈이었다. 아무것도 아닐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던 사람들이, 아무것이 되자마자 다가오는 것엔 결국 각자의 이해와 목적이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을, 몸을 그리고 마음을 각자의 이유로 탐하고 얻기 위해 사람들은 대게 다정이란 무기를 선택했...
가장 곤욕스러운 시간이었다. 분명 하루 종일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커피 한 잔 제대로 마실 틈 없이 일을 했는데, 업무 일지를 쓰는 순간만 되면 마치 하루를 공으로 날린 것마냥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정신없이 달려들었던 일거리들을 멋지게 쳐냈던 순간들은 어느새 겨우 방망이로 눈 앞의 일을 틀어 막는 수준의 보잘 ...
대단히 엄청난 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을 줄도 모르긴 했다. 들은 풍문이 키운 환상은 돈이 든 것도 아니었지만, 막상 닥친 실제가 너무도 아무것이 아니니 이건 준 것 없이 사기 맞은 느낌이라 빌려 준 적도 없는 돈 떼인 기분이었다. “아이...” 평생을 섬사람으로 살아온 강동호에게 뭍은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세기말이나...
다정은 특기 귀여워. 그 한 마디로 강의실이 발칵 뒤집혔다는 건 조금 나중에 알았다. 정확히는 내가 그 한마디를 듣지 못해서였고, 또 정확히는 그 말이 강의실을 뒤집을 만큼의 말이라는 것에 전혀 공감하지 못해서 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그걸 알아보라고?” “어, 너 말고 알아볼 사람이 없어.” 할 일이 그렇게 없냐. 꼭 그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
3. 사랑한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다. 돌이켜보니 내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진부한 이야기는 내게 없었다. 어색하게 불편한 첫 만남이 지나고, 언제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모든 순간에 사랑한다는 말이 있었다. 어제의 나는 그래서 사랑을 받았고, 오늘의 나는 이래서 사랑을 받았으며, 내일의 나는 그러기에 또 사랑받을 것을 도무...
반칙의 허용범위 손에 들린 펜이 잠시 허공에서 멈칫했다. 앞에 앉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은 빨래를 개키던 손을 덩달아 멈추며 동호를 향해 빙글 웃어 보였다. 왜요, 너무 시시해? 순간 돌아오는 물음에 손에 쥐고 있던 펜을 고쳐 꽉 주먹 속에 쥔 동호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 심오해서.” “심오는 무슨.” “.....” 동호의 대꾸에 손에 ...
그럴듯한 결론 대학 신입생이라는 게 뭐 다 그렇다. 자기가 술을 얼마나 마실 줄 아는 줄을 모르니까 일단 입으로 가져가긴 하는데 막상 또 그게 되게 맛있거나 황홀하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액체의 알콜이 정말로 과학실험에나 쓰는 비커에 담긴 알콜 맛이 난다고 못 먹겠다고 내빼는 순간 스무 살의 간지는 팍 상하고 만다. 그 간지 하나 믿고 대학이라는 ...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